이런 경우는 所志 등에서도 확인되는데 양반층이 문서 상에 實名을 기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1857)이 仁과 富를 겸비했다고 일컬어졌다는 것이 주목된다.卞致洪)ㆍ卞五錫(호 此愚)과 부인 恩津林氏, 卞永根의 만사와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1920년(경신) 변오석, 1929년(기사) 변영근, 1945년(을유) 변오석의 처 恩津林氏의 상을 치를 때 각각 작성한 3책이 전한다. 이어 경신(1800)년 4월 還安時 大祝ㆍ奉幀者의 명단과 지알자, 그리고 신유(1801)년 2월 宋先生奉安時 參享者, 宋先生 影幀 移摹有司의 명단, 그리고 時到記(참석한 사람들 명단)가 적혀있다. 이 사업을 위하여 대전오피 천원이라는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여 이주(移住) 398호(戶), 이전(移轉) 166호, 독립건물 109동을 철거하였다. 이 내용은 1910년 9월 23일부터 10월 10일 날짜까지의 윗칸에 기재되어 있다. 무오(1858)년에 작성된 것은 본관과 이름, 그리고 지알한 월일이 기재되어 있으며 거주지가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강재식ㆍ강수홍과의 산송처럼 한 사건이 20년 이상 지속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鄭閏鎬의 偸葬을 둘러싼 분쟁은 1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所志와 議送이 계속되면서 관련 문서가 19건이나 되었다.

변씨 가는 세거지인 屛山을 중심으로 인근의 여러 곳에 墓山을 조성하였는데, 여러 차례 偸葬을 당하여 관에 呈訴하기도 하였거니와 투장자로 지목되어 피소되기도 하였다.卞致恒)이 호주인 단자로 당시의 거주지는 東面 加洞 士屛山里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進士 李庭德 등의 等狀에 의거하여 1868년 감사가 올린 啓門의 초안과 변중량ㆍ변벽, 변벽의 처 南平文氏와 延安李氏에게 내린 교지가 등서되어 있다. 명단의 金履永ㆍ金陽淳은 道伯이었으며 金宗善ㆍ南周獻ㆍ金麟淳ㆍ李魯俊 등은 각각 宜寧ㆍ咸陽ㆍ居昌의 수령이었다. 이씨 문중의 주장은 1617년(광해군 9)에 그 선조인 李巘이 坮를 세우고 趙絅이 봉황대로 명명하였다는 것으로 변씨들의 연고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자료가 강한규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역상일기 19책이다. 이 일기는 1830년부터 1890년까지, 어찌보면 조선사회가 가장 크게 동요하던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1868) 등과 교유하며 학문과 문장으로 인근에서 크게 명망을 얻었던 인물이다.에 병암서원에서 간행되었는데, 奎章閣提學 沈象奎가 重刊序文을 썼고, 교감을 담당한 金是瓚이 重刊識를 썼다.

重刊과 관련하여 京鄕의 명망가들이 보내온 편지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는 土地ㆍ家屋ㆍ奴婢ㆍ樹木 등을 사고 판 매매문기가 112건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나머지는 手記ㆍ手票 17건, 일제시기에 작성된 매매계약서ㆍ차용계약서ㆍ차용증 등이 13건이다. 매매문기는 전체 112건 중 田畓과 林野 등 토지매매문기가 93건이며, 奴婢, 樹木, 家屋 매매문기가 2건씩이다. 나머지 14건은 田畓, 林野, 家屋, 樹木 등을 함께 방매한 경우인데, 이를 합산하면 토지를 포함한 매매문기는 105건이어서 대부분의 매매가 토지를 끼고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는 마을종합개발계획도를 포함해 마을일지, 방송원고일지, 징계대장, 회의록, 새마을사업일지, 마을일지 등이 남아 있어 마을단위 새마을운동의 추진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1906)의 문집으로 1956년 경 卞元植이 주도하여 간행하였는데, 가장본은 그 초고본으로 교정의 흔적이 남아 있다.賣買契約書, 借用契約書 등 새로운 형식의 문서는 1912년부터 작성된 것이 남아 있다.

Ⅰ. 소장 자료의 종류와 내용 密陽卞氏 가에 소장된 자료는 모두 358건이다. 이중 賣買 및 契約과 관련된 문서가 142건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所志 등 소송과 청원에 관련된 문서가 89건으로 그 다음을 차지한다. 이 집안에 소장된 자료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1528)이 건립한 정자로 그가 金湜을 만났던 곳으로 전한다. 이 말은 그가 宗家를 위해 자신의 전답을 희사하고 가난한 자들을 많이 도운 데서 비롯된 것으로 전하는데, 이를 보면 그는 상당한 재력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후기 양반 가에서 奴名으로 거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변오석이 직접 거래에 나선 상황은 관행이 점차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卞致恒)의 戶口單子에 仰役奴로 올라 있는데 1865년부터 1884년까지 13건의 매매문기에 수급자로 등장한다. 1905년까지는 奴 以完의 이름으로 거래하였다. 윤시영은 1894년 8월 17일 兩湖宣撫使의 從事官으로 제수된다.